2000년대를 전후로 몰아치는 오토캠핑 바람으로 인해 갤로퍼 롱보디의 가치가 재조명되었다. 

3열 시트만 걷어 치우더라도 넓은 적재 공간이 나오며, 

3열 바닥을 높이고 2열 시트를 앞으로 접은 후 매트를 깔면 

성인 두명이 누워서 잘 수 있어 복잡하게 텐트를 펴지 않아도 

차내에서 간단한 캠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갤로퍼 캠핑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거기에 프레임 바디에 4륜구동이라 남이섬 등 험한 지형을 주파하여 

캠핑 사이트에 접근해야하는 경우 적절한 오프로드 주행도 가능하다. 

더욱이 생산된 양이 엄청났던 만큼 중고차 값도 싸다. 

비교적 매커니즘이 복잡하지 않고, 많이 퍼진 차라 

시골 카센터에서도 어렵지 않게 수리가 가능한데다 

수리 부속 역시 모비스를 통해 비교적 싼 값에 풍부히 공급되고 있어 유지 보수도 쉽다.


이러한 특징들에 포인트를 둔 특정 인물이 갤로퍼를 세미 오프로드 및 캠핑용으로 

개조하는 과정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단종되어가던 갤로퍼 관련 오프로드 아이템이 

다시 재생산될 정도로 갤로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심지어 상태 좋은 중고차량의 경우 중고시세가 다시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갤로퍼 리스토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013년이래 리스토어 열풍이 불면서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차종이다. 

당장 네이버에서 '리스토어'를 검색하면 상위 항목에 갤로퍼 내지 레토나가 나온다. 

당시 생산됐던 국산 차량들 중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중고차가 많이 남은데다가, 

오래된 차종 중 가장 부품을 수급하기에도 좋고, 

지금 봐도 멋진 디자인이 인기 요인으로 보인다. 


모노코크 타입보다 내구성이 좋고 복구하기도 유리한 프레임 차종이라는 것도 한 몫 했다. 

최근에는 모헤닉게라지스라는 법인회사가 주도적으로 리스토어를 하고있는데, 

해당 업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갤로퍼 리스토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리고 애초에 유행으로 인해 재료가 되는 중고차의 가격이 오르고, 

부품이 더 희귀해지고, 

리스토어 된 차량들이 매물로 나오면서 시세가 또 올라가는 현재의 양상은 

유행에 의해 지나치게 과열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보인다.


현대 갤로퍼는 울릉도에도 오래 전 택시로 이용된 적이 있었으며 

강원도의 일부 산간 오지 마을에도 택시로 운행하였다. 

그 쪽은 지형상 세단카로는 택시를 이용하는데 문제가 있어 SUV를 택시로 쓰게 된다. 

1990년대 울릉도 택시 주요 차종이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는 아버지 차로 운전을 처음 배우던 시기에 몰았던 차량이다.

지금과 비교하면 파워핸들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무거운 핸들과

매우 좋지 않았던 연비로 유지비가 많이 들던 차이기도 하지만

막 타기에는 좋았던 차로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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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로퍼 2 시기부터는 세제 혜택의 변동에 따라 승합차로 분류되기 위해 

7인승, 9인승, 밴(화물차) 등 다양한 라인업이 등장했으며, 

쇼트보디 모델인 갤로퍼2 이노베이션 모델도 출시된다. 

가솔린 모델과 같은 D11BA 엔진에 연료만 LPG를 사용하는 모델도 출시되었다.


갤로퍼 시리즈가 인기를 끌다 보니, 

갤로퍼 2 중에선 "이노베이션" 이라는 이름으로 숏바디 스페셜 모델도 출시되었었다.

허나 사실 이건 미쓰비시에서 나온 파제로 스페셜 모델인 파제로 에볼루션과 판박이..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엔진/미션/서스펜션을 모두 파제로와 별개일 정도로 특별하게 꾸민 

파제로 에볼루션과는 달리 갤로퍼 이노베이션은 외부디자인을 제외한 

내부는 기존 갤로퍼 2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튼튼해 보이면서 귀여운 외형과는 달리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찌그러지는 깡통이었으니...

갤로퍼 이노베이션 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91년부터 1999년까지 갤로퍼는 4WD 차량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할 정도로 

효자 상품이었으나,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고급화되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는데 한계가 생긴다. 

사실 갤로퍼가 4WD 차량을 고급화 시킨 선두주자임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하지만, 

10년 넘게 비슷한 차종들로만 구성된 SUV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염증을 느낄때 즈음에, 

참신하고 세련된 차세대 차종인, 테라칸과, 렉스턴, 쏘렌토등의 

신모델 출시와 더불어, 

2000년대 들어서는 이제 소비자들도 4WD 차량을 더 이상 특수 차량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빈약한 편의 시설, 조잡한 오디오 등으로 갤로퍼는 더 이상 '고급'의 이미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테라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게다가 2000년부터 점차 환경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어 

구형의 디젤 엔진은 환경부의 규제를 충족할 수 없게 된다. 

비슷한 시기 동안 생산되던 무쏘가 아직까지 잘 굴러다니고 매연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슬픈 상황. 

벤츠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좋은 엔진을 도입했다면... 


또한 점차 기술의 발전에 따른 CRDI 엔진의 보급이라는 치명타를 맞게 됨으로써 

갤로퍼는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베라크루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003년을 마지막으로 갤로퍼는 단종되고 그 뒤는 테라칸이 잇게 된다. 

이후 후속작인 베라크루즈가 나왔지만 갤로퍼 테라칸 보다 못한 험로주파 성능으로 

오히려 더 외면받고 쌍용자동차의 렉스턴과 기아자동차의 쏘렌토에 밀리고 말더니, 

결국 10년 가까이 팔다가 2015년에 단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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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정주영 회장의 갤로퍼 사랑이 각별해서 

정주영 회장이 운영하는 충남 서산 농장에서 갤로퍼를 개인 차량으로 공수해 와서 

직접 운전하고 다녔을 정도다.


정주영 회장의 서산 농장 자가용은 갤로퍼의 초기 모델은 아니고 

1994년에 페이스리프트 된 뉴 갤로퍼 모델로, 

서산 농장 숙소에는 정주영 회장이 타고 다니던 갤로퍼 차량이 아직까지 있다고 한다. 

정주영 갤로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또한 북한군이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갤로퍼를 군용 지프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992년 갤로퍼 출시 1주년을 맞이하여 방영하였던 광고로, 

세계 여행가로 유명한 故 김찬삼 세종대 명예교수가 실제로 갤로퍼 자동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질주하는 형식의 광고였다. 

그 당시 김찬삼 교수는 6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88일간의 대장정을 완수했으며, 

그 여정에 따라 총 5편으로 나뉘어 방영하였다. 

부제는 가자, 해를 따라 서쪽으로.


1994년 유라시아 대장정에 이어 방영되었던 갤로퍼 2번째 대장정 광고. 

이번에는 고구려를 소재로 하여서 중국 북부 고구려 지대 지역을 질주하는 형식의 광고였다. 

총 5편으로 나뉘어 방영하였다. 

부제는 가자! 고구려

갤로퍼 가자!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갤로퍼는 기존 4WD 차량의 투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급화된 이미지를 통해 

기존 SUV 차량의 총 판매량을 늘리는데 기여하지만 곧이어 강력한 경쟁자인 

1993년 7월 기아자동차에서 스포티지를 출시하고 

같은 해 8월 쌍용자동차에서는 무쏘를 출시하며 위기를 맞는다. 


이에 방어 전략을 취하고자 현대정공에서는 1994년 페이스 리프트를 통해 

뉴 갤로퍼 및 인터쿨러 모델을 출시하고 

1997년에는 갤로퍼 2를 출시한다. 

방어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가, 

무려 9년동안이나 4륜구동 R/V 판매량 1위를 유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갤로퍼2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성기 시절의 갤로퍼의 라인업은 무려 40개 가까이 되는데, 

이는 무쏘와 스포티지, 레토나와 코란도의 라인업을 전부 합쳐도 갤로퍼가 더 많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현대정공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4륜 구동 차량 제작 사업 부문을 현대자동차에 넘겨 주게 되고, 

철도 차량 제작 사업 부문은 로템으로 이관시켜 

자동차 전장 부품 전문 기업체인 오늘날의 현대모비스로 탈바꿈하게 되며, 

1999년부터는 갤로퍼 라인업 제작을 현대자동차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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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와도 장기간 공유 특히 D4BA D4BF D4BH엔진... 

그나마도 포터와 그레이스는 중간에 D4BB엔진으로 배기량을 올리는 

소소한개량을 거쳤으나 갤로퍼는 그것도 아니었다. 

계속 D4BA D4BF만을 사용했다. 

심지어 나중엔 쏘렌토와 스타렉스,리베로 그리고 포터2,봉고3 후속모델인 테라칸에까지 얹는 

그 D4BH (TCI)엔진을 사용함으로써 테라칸은 렉스턴에 처절하게 밟히는 바람에 

결국 기아의 2900cc J9엔진으로 바꿨지만... 


그래서인지 중저속에서의 가속력은 좋았으나 

시속 140km로 4~5시간 달리는 건 매우 큰 부담이었으며, 

괜히 엔진 출력 올려보겠다고 튜닝을 했다가는 엔진이 버티질 못하였다. 

갤로퍼 엔진 수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경쟁 모델인 무쏘가 88만km를 무보링 상태로 달리는 기염을 토한 반면 

갤로퍼의 엔진은 대략 20만km 정도면 엔진 보링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 때문에 실제 갤로퍼 매니아들도 엔진을 튜닝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는 파제로 디젤모델의 판매지역의 특성을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은 80년대 당시 제한속도가 제일 빨라봐야 시속 80km 이하였고, 

디젤을 주력으로 수출했던 유럽 지역 역시 아우토반 같은 곳이 아닌 이상 

제한속도가 대체로 한국 도로보다 낮게 설정되있기에 

굳이 고속주행을 고려해서 설계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게다가 파제로가 일본의 좌측 통행 기준으로 설계 및 디자인 된 차량이라, 

갤로퍼 역시 이 파제로의 설계를 그대로 적용하여 후방 트렁크 문 역시 

좌측에서 열도록 되는 바람에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여간 불편하고 위험한 게 아니었다.

미쓰비시 파제로 엔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만 이는 갤로퍼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모델인 미쓰비시 파제로의 

우측 통행 국가 전용 수출 모델에도 똑같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현대 측에서 성의가 없어 수정을 안 한 게 아니라 

원래 모델 제조사이자 당시 현대의 자동차 기술의 근간이자 현대자동차의 대주주로 

경영에도 참여했던 미쓰비시의 입김 때문에 

국내 사정에 맞게 설계 수정을 하고 싶어도 못했다 보는 게 맞다.


나중에 미쓰비시 자동차의 입김이 줄어들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 출시된 

후속 라인업 테라칸에는 현대자동차가 아예 뒷문을 해치 게이트로 변경해 버렸다. 

갤로퍼 트렁크 방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결국 이 트렁크 문짝 설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쓰비시의 파제로 후미 디자인에 대한 똥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며, 

갤로퍼 개발 당시 현대는 자동차 분야에서 미쓰비시의 손에 놀아나던 상황이었기에 

미쓰비시의 요구에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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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로퍼는 출시되자마자 현대 브랜드를 앞세우는 마케팅으로 국내 4WD 시장에 정면 승부했다. 

분명 현대정공에서 제작한 모델이지만 이니셜도 HYUNDAI라고 표기한 덕에 

소비자의 눈에는 현대자동차의 모델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갤로퍼 2에서도 현대정공을 의미하는 찌그러진 형태의 ‘H’엠블럼이 

유일한 차이였을 뿐일 정도였다. 


덕분에 자동차 제작 신생 업체 이미지를 상당부를 가리는 동시에, 

현대자동차의 명성을 등에 업고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갤로퍼의 초창기 CF를 보면 현대정공이라는 제작사 이름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대신에 현대라는 두리뭉실한 명칭을 사용한다.

현대정공 갤로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차량의 외관이나 엔진은 파제로를 그대로 들여왔는데, 

이는 당시 경쟁 모델에 비해 디자인이나 엔진 성능면에서 차별화 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케팅도 적극적이었기에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갤로퍼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엔 SUV 차량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출시 당시의 엔진은 형식명 4D56인 디젤 4기통 2,476cc에 73마력으로 당시로서는 굉장한 것이었다. 

이후 터보차저를 얹어 출력을 81마력으로 올리기도 했으며, 

터보차저에다가 인터쿨러를 얹어 101마력까지 끌어올렸다. 

또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하던 각그랜저의 V6 3000 모델에 탑재되던 

형식명 6G72인 SOHC V형 6기통 2,972cc의 가솔린 모델도 있었는데 

당시 신차 가격이 2,000만원을 육박했다.

이 당시의 2천만원이면 지금의 베라크루즈나 모하비급으로 생각하면 된다.

연비는 6.9km/L.

갤로퍼 엔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갤로퍼의 장점은 제원상 겨우 101마력의 출력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RPM에서 최대 토크가 나오기 때문에 "힘이 좋다"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 

게다가 넓은 휠하우스는 개조 없이도 31인치 타이어까지 무난하게 장착할 수 있으며, 

최저 지상고도 높아 비포장길의 주파성이 우수하였다. 


특히 출시 초창기 당시에 갤로퍼 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정공 측에서 

7만km 가량의 유라시아 대륙 횡단 이벤트를 두 번 씩이나 펼치는 등 

갤로퍼의 내구성에 대한 마케팅적 노력도 상당했다. 

갤로퍼 대장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지만 엔진의 실제 내구성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엔진 자체가 미쓰비시에서 도입한 것이기에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오리지널인 미쓰비시 파제로의 경우 주력은 디젤이 아니라 휘발유 엔진이었고 

디젤엔진 역시 배기량과 설계를 바꿔가며 계속 수정해 나갔었는데

(갤로퍼 출시 당시인 2세대 파제로 출시 즈음엔 다른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초창기 도입한 2500cc 엔진을 배기량 한번 바꾸지 않고 주구장창 수 십 년 동안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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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는 자잘한 고장과 크기/성능 등의 문제로 판매가 많지 않았고, 

쌍용자동차의 코란도와 코란도 훼미리 역시 성능이 많이 떨어졌고 

프랑스/일제/미제 엔진과 변속기들을 섞어쓰던 막장상황이라 

온갖 문제점을 노출하던 시절인데 비해, 

갤로퍼의 경우 미쓰비시 자동차의 세계시장 최대 히트작인 파제로를 

거의 재조립해서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차량의 성능이나 신뢰성 면에서 

이미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비시 파제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당시 4WD 차량과 대형 상용차만 제작하던 쌍용자동차는 

한 때 회사가 존폐 위기까지 처하기도 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독일의 고급 메이커인 메르세데스 벤츠와 합작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인 

FJ 프로젝트를 통해 2년 뒤인 1993년에 93 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으로 

4WD 신모델인 무쏘를 출시하여 회심의 일격을 제대로 날리며 

그 동안의 4WD 모델 전문 제작사로서의 명성을 되찾아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미쓰비시 파제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갤로퍼 전기형의 경우 외형만 보면 파제로 모델에서 미쯔비시 글자를 현대로 바꾼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초기부터 인기몰이를 했다.

가솔린 모델의 경우 3.0 외에 2.4도 92년 8월에 출시한 적이 있지만, 

판매량이 저조하여 조용히 삭제되었다.


93년 하반기에 인터쿨러도 출시되었지만, 

초기형에 인터쿨러는 의외로 상당히 레어템이다.


여담으로 대부분의 차가 한국에서 흑색, 백색, 회색, 은색 같은 무채색 컬러가 

주력인것과 달리 초기형 갤로퍼는 은근히 유채색 컬러의 비율이 높다.

갤로퍼1 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갤로퍼 후기형(판매 당시의 정식 명칭은 뉴 갤로퍼)의 경우

헤드램프와 그릴을 살짝 손 보고, 

사이드미러를 플래그 타입으로 변경했는데, 

여기까지는 여전히 파제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롱바디 모델에 후석 암레스트 등의 몇가지 편의장비가 추가되었다. 


1997년 출시된 갤로퍼2의 경우는 기존 갤로퍼보다 곡선이 군데군데 들어가서 

비교적으로 날렵해보인다.


갤로퍼2 전기형은 현대정공을 뜻하는 찌그러진 H자가 쓰이게 된다.

2000년 5월 22일에 출시한 갤로퍼2 후기형 부터는 아예 현대자동차 로고를 대놓고 장착한다. 

슈퍼엑시드 한정으로 운전석 에어백, 가죽시트, CDP가 적용되었으며 

V6 가솔린 모델이 단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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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주영 회장의 뜻에 힘입은 현대정공 사장 정몽구는 

1989년 7월 4WD 고유모델 개발 추진을 결정한다. 

프로젝트명은 "M-CAR". 

마북리 연구소를 건립하고 현대자동차의 엔진과 국산화 부품을 활용해 

고유모델 개발에 힘을 쏟아 4WD 모델 시제품을 개발하였고, 

미국 업체의 도움으로 미국 시장에서 성능테스트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대 실패였다. 

갤로퍼 초기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일반 승용차에 비해 차체 구조가 복잡하고 높은 강성과 품질이 요구되는 특성을 지녀 

설계가 까다로웠고, 미국 시장의 소비자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데다 

이미 지프 등의 기라성 같은 메이커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정몽구 사장은 고유모델 개발을 포기하고, 

대신에 신뢰성 있는 메이커 업체의 4WD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전략으로 급선회 한다. 

고유모델 개발만 고집하다가 시장에 제대로 진출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라이센스 모델 생산으로 완성차 시장 진출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고 

신기술을 빨리 습득하여 배우면서 실력을 쌓자는 의미가 컸다.

미쓰비시 파제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러 차종의 검토를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미쓰비시 자동차의 유명 4WD 모델인 

1세대 파제로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파제로가 4WD 모델로서는 상당히 명성이 큰 것도 있었지만, 

제작사인 미쓰비시 자동차가 이미 현대자동차와 다양한 분야에서 제휴를 맺어온 파트너였기에 

협업도 쉬울 것이라는 점이 크게 고려 되었다. 

게다가 당시 1세대 파제로는 일본의 경제력향상에 따른 SUV붐을 타고 

상당한 인기를 얻으며 2세대 모델 개발에 착수하며 거듭나던 시점이었기에, 

미쓰비시 자동차 입장에서 구형이 된 1세대 파제로의 기술을 현대정공에 넘겨도 

해가 될 일은 아니었다. 


1989년 10월에 양사는 사업 추진 의향서를 교환하고, 1990년 3월에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한다. 

갤로퍼 1호차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91년 9월 16일 갤로퍼 1호 차량을 생산하고 

그 다음주인 25일에 외부에 최초로 공개하여 10월부터 출고가 시작되었다. 

디젤 롱바디를 먼저 선보이고, 

11월에는 자동변속기 모델, 12월에는 터보 디젤엔진 롱바디 모델이 출시되었다.


출시 당해인 1991년에 약 3개월 동안만 무려 3000 여 대 가까이 판매를 기록하며 

쌍용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만 생산하던 4WD 시장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고, 

그 이듬해인 1992년에는 총 2만 4천 여 대가 판매되면서 

국내 4WD 시장의 52%를 차지하며 순식간에 장악을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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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소개할 차는 현대 자동차의 SUV의 시초 갤로퍼이다.


현대정공과 현대자동차에서 1991년 10월부터 2004년 1월까지 생산했던 

프레임 타입 4WD SUV 자동차이다. 

쌍용의 초기 코란도와 더불어,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오프로드의 명장이다.

갤로퍼의 어원인 갤럽(gallop)은 말 따위의 동물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현대 갤로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제5공화국 시절에 내려졌던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1987년에 해제되면서 

당시 항공기, 철도차량, 공작기계 등 기계산업 분야 주력하던 현대정공에서 

기계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 제작 사업에도 진출을 시작 하여 

종합 기계 메이커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당시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으로 3저 호황을 누리며 국민 삶의 질도 향상되어 

레저 붐이 일어나던 시기로, 

4WD SUV 차량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되어 

4WD 모델을 중심으로 제작하는 사업을 계획했는데, 

당시에 마침 같은 계열사인 현대자동차가 4WD 모델 제작 사업에 뛰어들 계획이 없어 

계열사 간의 사업 영역 충돌도 없던 덕에, 

정주영 회장이 현대정공의 4륜구동 사업 진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현대 갤로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근데 현대자동차 한 곳에 자동차 제작 사업을 집중하는게 절차상으로도 훨씬 간단하고 

그룹 차원에서도 효율성이 더 좋을텐데, 

정주형 회장이 굳이 현대정공에 자동차 제작 사업 일부를 별도로 신규 지원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1980년대 중후반 당시에는 현대자동차가 지금의 정몽구 회장 체제가 아닌 

정주영 회장의 동생이자 현대자동차의 초기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정세영 회장 체제가 굳건하던 시기였고, 

정몽구와 정세영 일가와의 현대자동차 후계구도에 대한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현대정공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당시 그룹 총수였던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상 장남인 정몽구의 그룹 주요 사업의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동안 고생해서 현대자동차의 창립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친동생 정세영을 

의리없이 단칼에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현대자동차와 비슷한 계통으로 항공, 철도차량, 공작기계, 자동차 부품등의 사업분야를 가진 

기계산업 부문 종합 메이커였던 현대정공을 아들 정몽구에게 맡기고 있었고, 

때마침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된 덕분에 현대자동차가 아직 진출하지 않았던

4WD 및 SUV 자동차 제작사업을 일부러 현대정공 쪽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하여 

친동생 정세영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없는 선에서 나름 현명하게 

아들 정몽구에게 현대자동차 후계 구도의 기회를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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