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트랙터로 번 돈으로 고급차를 여러 대 구입해 몰고 다녔고, 
이 중 페라리의 250GT가 있었다. 
차 자체는 괜찮았으나 클러치가 계속 오작동을 하는 것을 발견한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차를 분해해보았고, 
그 결과 람보르기니에서 생산하던 한낱 트랙터와 
최고급 페라리에 사용한 클러치가 같은 제품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엔초 페라리를 직접 만나 
자신이 발견한 클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페라리 본사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엔초 페라리를 만난 페루초 람보르기니였지만, 
당시 모터스포츠에서 연승을 거두어 자만하던 엔초 페라리는 
그의 면전에 대고 "댁같은 사람은 트랙터 모는 법이나 알면 됐고, 
내 차는 당신 분수에 안 맞으니 나가라."는 투로 대꾸하고 그대로 내쫒았다고 한다. 


그의 말은 페루초 람보르기니의 불 같은 성격에 기름을 부었고 
그 말에 화가 난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제대로된 스포츠카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이후 1963년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스포츠카 공장을 신설하고 
첫 번째 차량 350GT를 생산했다. 
1966년 람보르기니는 세계 최초의 슈퍼카라 할수있는 미우라를 발표했다. 
이 차는 리어 미드십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자동차였다. 
본디 빠르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차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그였지만, 
미우라의 성공으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의 뒤를 이을 강력한 신차를 계획했다. 


하지만 신차의 탄생을 지켜보기 전 그는 트랙터 사업의 재정난과 
석유파동으로 1972년 회사를 매각해야했다.

2년 후인 1974년 페루초 람보르기니가 꿈꿨던 자동차인 쿤타치를 내놓았고 
유명한 시저 도어도 이때 첫선을 보였다. 
당시에는 이미 스포츠카 사업에서 손을 뗀 그였지만 
그래도 생전에 자신이 설립한 회사 제품이라고 쿤타치를 즐겨 타고 다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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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에 비해 판매 대수도 적고 역대 모델 수도 상당히 적은 편이다. 
현재에도 페라리의 생산 모델은 8기통 엔진을 탑재한 엔트리 모델 488 GTB와 
그 파생형 모델들인 488 스파이더, 
컨버터블 GT인 페라리 포르토피노, 
4인승 슈팅브레이크인 12기통 슈팅브레이크 GTC 4 Lusso와 그것의 파생형 모델인 
8기통 GTC Lusso T,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플래그쉽 GT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로 무려 7종류에 달하지만, 


람보르기니는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플래그쉽인 아벤타도르S와 
아벤타도르S 로드스터, 
10기통 엔진을 탑재한 엔트리 모델 우라칸과 우라칸 스파이더, 
우라칸 RWD, 우라칸 RWD 스파이더, 퍼포만테, 
그리고 우루스 즉 차량 세종의 사양변경 모델만 있다.


페라리보다 판매 모델 수가 적고 모델 풀체인지 주기가 긴 대신 
도중에 한 번씩 페라리는 거의 하지 않는 페이스리프트와 
성능 향상을 거치기 때문에 퍼포먼스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 편이다.

2015년에 측정된 직원수는 1175명이며 그 뒤로도 더 많은 직원들을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한해 판매량은 2014년 대비 28% 상승한 3245대를 판매하였다고 한다. 
이는 우라칸과 아벤타도르의 판매호조 덕분인데, 
우라칸은 2242대, 아벤타도르는 1003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매출은 전년대비 39%가 증가한 1조 1537억 원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1998년 폭스바겐 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창업주의 삶을 짧게 얘기해보자면 
1916년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에서 포도농부 부부들 사이에서 태어 났다. 
그리고 기술자들이 그랬듯이 어렸을때 부터 농업보다는 농기구와 기계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람보르기니의 부모들은 아들을 볼로냐의 기계학교로 보내 기계를 배우게 했고,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이탈리아 공군에 징집되어 
로도스 섬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차량정비병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영국군 포로로 1년간 억류뒤 1946년도에 귀국을 하면서 
자동차 정비소를 차렸고 
1947년도에 페루초 람보르기니에게 부를 안겨다 줬던 트랙터 사업을 시작 했는데, 
당시 마셜 플랜으로 인해 농업쪽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왔고 
2차 대전이후 농업의 자동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트랙터의 수요가 엄청났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까지 경작용 트랙터를 생산하는 일을 하며 산업왕국을 세웠다

Posted by 그대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