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모터 스포츠계의 초창기인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카레이싱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모델 중 하나로도 유명했다. 

당시 박정룡, 김한봉 등 1세대 카레이서들이 모두 이 차를 한 번씩 탔을 정도였다.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하위 클래스에서도 프라이드를 타는 드라이버를 볼 수 있었다.

기아 프라이드 레이싱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처음에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공장에서 생산되다가, 

1993년부터는 단종될 때까지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광역시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아시아자동차에서는 이 차의 기본 섀시를 이용한 신차 또는 마이너 체인지를 검토했지만, 

모기업인 기아자동차가 1997년 외환 위기를 앞둔 1997년 8월에 부도가 나는 바람에 

현대자동차에 흡수되고 자동차 중장기 라인업 개발 계획에서 최종 제외되면서 

프로젝트 자체가 백지화되어 결국 단종되었다. 


심지어는 기아 리오를 출시할 때 진행하려고 했던 한국 자동차 최초와 다름없는 

은퇴식 이벤트조차 실현되지 못했다. 


현대, 기아자동차와 넥슨과의 제휴로 현대 포니와 함께 카트라이더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기간 한정판매.

카트라이더 프라이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때 사용된 차종이라는 흑역사가 있으며 

의외로 슈퍼전대 시리즈에 등장한 국산차라 할 수 있는데 

초신성 플래시맨에 오토라마 브랜드로 팔린 페스티바가 극 중에 나온다.


응답하라 1988에서 김성균이 10화에서 새로 산 차로 나왔다. 

최하트림인 1.1리터 3도어 팝 버전이다.

프라이드 강재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문화방송 강재형 아나운서가 1987년식 3도어 모델을 아직도 타고 있다. 

신차 출고 이후 쭉 관리하면서 타고 있다고. 

MBC 2017년 총파업 당시 허일후 아나운서가 "검은 프라이드가 보이면 강재형 조합원의 차"라고 해서 

현재까지 타는 게 확인되었다.


엑셀과 르망은 지금 도로에서 보기 아주 힘든 차가 되었지만

비교적 오래 생산하였고, 튼튼했던 프라이드는

1세대 차량도 종종 도로에서 보이곤 한다.

2세대 3세대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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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3도어 CD, EF, DM 트림만 판매되었다가 

FS 트림을 추가, 후에는 5도어까지 출시하였다. 

트림명 각각의 의미는 기아산업의 사훈에서 따오게 되었다. 

CD(CREDIT, 신용), EF(EFFORT, 노력), DM(DREAM, 꿈). 

후에 나온 FS(FIRST)는 사훈은 아니다. 

초기형 FS 트림에는 시트에 pride라고 로고가 박혀 있었다. 

1989년에는 라디에이터 그릴을 5도어 형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다 1990년에 기아자동차로 바뀌고, 4도어 세단인 프라이드 베타가 나왔다. 

프라이드 1세대 광고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SOHC 엔진은 1.1리터 직렬 4기통 70마력, 

1.3리터 78마력 2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고 

5단 수동과 3단 자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1.1리터 엔진은 카뷰레이터식이었고, 

1.3리터 엔진은 전기형은 카뷰레이터 방식, 후기형의 경우 EGI 전자제어 방식을 사용한 

엔진이 채택되었다. 

1990년대 중반 데뷔한 프라이드 왜건 모델에는 전량 EGI, 

이전부터 꾸준히 생산되고 있던 3도어와 5도어 FS 트림과 베타 모델의 경우 

GLXi 트림에만 EGI 엔진이 적용되다가 1990년 중후반 전량 EGI 엔진으로 교체 생산되었다. 

프라이드 1세대 엔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94년 당초 후속 차량으로 개발되었던 아벨라가 출시된 뒤에도 함께 팔렸다. 

그러나 아벨라와 팀킬을 일으키면서 기아의 프라이드 판매량은 반토막이 났다. 


2000년에 후속 차종인 리오가 발매된 후, 아벨라와 함께 단종되었다. 

그 후 2001년 이란의 사이파(SAIPA)라는 회사에서 1세대 프라이드의 설계를 사들여 

티바(Tiba)와 미니에이터(Miniator)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꾸준히 생산/판매 중이라고 한다. 

원판과 달리, 에어백과 ABS가 달려 있다.


2세대 이후의 프라이드와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계보로 봐도 상관없는 모델로, 

1세대 모델의 정식 후속모델을 개념과 수출명 기준으로 정리하면 

아벨라(포드 아스파이어)(페스티바 2세대 모델로 팔림) → 

포드 페스티바 3세대(마쓰다 데미오 1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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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출력은 동급 타사 차량에 비해 떨어지나, 

차체 중량이 가볍기 때문에 중량 대비 마력비가 좋은 것이다. 

단점이 될수도 장점이 될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만큼 민첩하고 힘은 좋지만 

차 크기가 작은 편이다. 


차를 잘 모르는 경우 경차급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동 시대에 활약했던 현대 엑셀에 비해 200kg 이상 가볍다. 

또한 차체가 매우 튼튼하기로도 유명하다. 

잔고장 적음 + 튼튼함의 결과로 수명도 매우 길다. 

후기형의 경우 2017년 현재도 차대 부식은 있지만, 잘만 굴러다닌다. 

중고 시장에서도 소형차지만 경차 수준으로 적은 감가율을 자랑한다.

프라이드 1세대 무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만, 트렁크 크기가 엄청 작아서, 있으나 마나다. 

그래서 나중에 세단형 버전인 프라이드 베타도 나왔다. 

베타는 해치백 모델과 달리 기아자동차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미국 포드 담당자가 내한하여 세단으로 만들어낸 것에 놀라기도 하였다는 후문이 있다. 

프라이드 1세대 무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또 5도어 왜건형인 프라이드 왜건과 프라이드 프렌드도 나왔지만, 

다른 세단형 승용차보다 역시 트렁크 크기가 작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뒷시트를 앞으로 넘기면 적재 공간이 매우 크게 나오며, 

차고가 높아서 도어 개구부만으로도 의외로 큰 짐을 실을 수 있었다. 

농담으로 "냉장고 빼곤 다 들어간다"고 할 정도. 

실내 차고가 얼마나 높았냐 하면, 

당시 국내 최장신인 기아자동차 농구 팀의 센터 한기범 선수가 타던 차이기도 하다.


저렴한 유지비로 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다른 소형차들이 넘을 수 없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프라이드 1세대 무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대우 티코에 대응하기 위해서 옵션을 대부분 빼 버린, 

한 마디로 전자 장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깡통 모델인 프라이드 pop이라는 

3도어 모델을 1991년에 출시하여 1993년까지 생산하기도 했다.

(팝에는 1.1리터 엔진 장착)


현대 아반떼 투어링, 대우 누비라 스패건 등의 스테이션 왜건 시대가 잠시 도래하자 

기아자동차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파크타운과 함께 

프라이드 왜건, 프라이드 프렌드라는 모델도 내놓는다. 

또한, 출시 10주년을 맞이한 1997년에는 

POP을 대신한 저가형 1.3리터 5도어 모델인 프라이드 영(Young)도 출시했다. 

게다가 상업용 모델 시장 공략을 위해 만든 2인승 승용 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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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먼저 이야기한 르망과 엑셀과 시대를 같이 했던 프라이드에 대해서 알아보자.


1987년부터 현재까지(무려 30년!) 이어지고 있는 기아자동차의 소형차 브랜드이자 

스포티지, 봉고와 함께 기아자동차를 대표하는 기아자동차의 상징적 아이콘

기아자동차의 전 라인업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2015년 현재 통산 200만대 돌파.

2017년 2월 기준으로 전세계 누적 판매량이 600만대를 돌파했다.


이중에서 르망과 엑셀과 시대를 같이 했던 1세대 프라이드에 대해서 알아보자.


1세대는 코드명 WA로, 1987~2000년까지 생산을 하였다.


크기는 상당히 작으나, 배기량 1.1L/1.3L로 소형차의 분류에 들어간다.

기아 프라이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87년 미국 포드, 일본 마쓰다, 대한민국 기아자동차 3사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차량이다. 

설계는 마쓰다가, 판매는 포드가, 생산은 기아자동차가 맡았으며, 

이 대가로 기아자동차는 미국 포드 산하 자회사인 머큐리의 세이블을 조립 생산하여 

국내에서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외국에서는 포드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팔렸다. 

일본 외에서 간혹 마쓰다 121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간혹 유럽에서도 마쓰다 브랜드로 팔린 프라이드가 보이기도 한다.

기아 프라이드 1세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쓰다의 전륜구동 DA 플랫폼을 사용하였다. 

여담으로, 포드에서는 이 프라이드의 차체에 포드 토러스 SHO의 V6 3000cc 엔진을 

미드십으로 배치하고, 구동계와 각종 설계를 건드려서 제로백 4초대가 나오는 

페스티바 쇼군이라는 차량을 딱 7대 한정으로 생산했다고 한다.

포드 페스티바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플랫폼의 완성도가 워낙 대단했던 나머지, 

마쓰다에서는 이 플랫폼으로 오토잼 레뷰, 포드 아스파이어, 1세대 마쓰다 데미오를 만들었다. 

1세대 마쓰다 데미오는 1996년 출시되어 2002년에 포드 피에스타 플랫폼 기반의 

2세대 데미오가 나올 때까지 계속 생산되었다. 

무려 16년 간 장수한 플랫폼인 셈이다.

마쓰다 121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장수하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잔고장이 없는 차량으로 유명하였다. 

단종 시점 즈음에 조사한 잔존비율에서 국내 차종 중 1위였다. 

소형차 치고는 출력도 좋아서 중형차들이 대관령을 에어컨 끄고 창문 열고 넘을때 

프라이드는 에어컨 켜고 넘었다던가 하는 전설에 가까운 실화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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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르망은 이전 포스트에서도 잘 설명 했지만

한국에 월드카 개념으로 GM 오펠의 카데트 E를 조립생산한 것인데, 

카데트 E가 유럽시장에 등장한 것은 1984년으로 사실상 기술적으로 뛰어난 차량은 아니었다.

1986년 3도어 해치백 레이서와 르망살롱(GTE), 

1988년 5도어 해치백 펜타파이브, 1989년 GSI와 1.6 TBI, 1990년 임팩트, 

1991년 이름셔 등 정말 다양한 엔진 및 트림을 내놓았고, 

특히 날렵한 디자인과 중후한 승차감, 

다른 차량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으로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현대 엑셀 가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하지만 르망은 소형차중에 가장 고가였고, 

젊은이들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한국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기어비로 인해 

가벼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둔중하기 이를데가 없이 느껴지는 낮은 순발력에, 

당시 대우차 특유의 엉망진창인 조립품질이 더해져 시장에서도 고만고만한 판매율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엑셀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1988년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Y2 쏘나타의 얼굴과 꽁무니를 

그대로 이식한 듯한 모습에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스타일은 소형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후한, 40대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실내 디자인은 소형차의 기본에 충실하였고, 

쏘나타에 달리던 전자제어식 연료분사장치를 달아 힘과 연비를 동시에 잡았다.

현대 엑셀 가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당시 잡지 기사를 보면 엑셀을 마치 스포츠카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균형잡힌 기어비와 리스폰스가 우수한 엔진의 감각 덕이지, 

실 성능은 체감 성능만큼 라이벌들을 압도할 정도는 절때 아니었다.

공차중량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아무리 우리나라에 적절한 기어비와 좋은 엔진을 사용했지만

공차중량이 무려 950Kg으로 프라이드 860Kg, 르망이 935Kg임을 감안하면 돼지수준이였다.


하지만 실제 운전자들의 체감성능은 매우 경쾌하고 날렵했으며, 

연비면에서 프라이드와 비교해서도 그다지 꿀리지 않으면서 

결정적으로는 현대자동차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세팅이자, 

한국사람들이 차량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부드럽다 못해 물컹할 정도의 안락한 승차감 또한 라이벌들의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현대 엑셀 하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현대가 기본적으로 스프링과 댐퍼를 워낙 무르게 세팅한 탓도 있지만, 

구조상으로도 프라이드나 르망은 리어에 토션빔 서스펜션을 채용했지만, 

엑셀은 리어에도 독립식 서스펜션인 풀 트레일링 암 방식을 채용했기 때문에 

승차감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수준이었던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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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엑셀이 잘팔렸고 평판이 좋았던 몇가지 이유가 있다.


1980년대 후반 자동차 시장은 지금과 같이 중~대형 비중이 높지 않았다. 

여전히 자동차는 고가의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발 경제 호조에 따라 한국 경제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각 가정에도 마이카 붐이 일었고, 

구매력이 있는 30~50대에서 첫 차로 소형차를 선호했기 때문에 

소형차 시장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대 엑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따라서 자동차 회사에서도 소형차 판촉에 가장 열을 올렸는데 

당시 시장에는 1986년 출시된 대우 르망과 1987년 출시된 기아 프라이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평균 자동차 교체 주기는 3년이었다. 

현대에서는 이에 따라 1985년에 출시된 현대 포니엑셀의 후속 차량을 개발했고 

그것이 바로 엑셀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아 프라이드는 일본과 포드에서 막 들여온 따끈따끈한 차체설계에 

뛰어난 동력성능과 경제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국내에선 크게 인기를 얻진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프라이드가 해치백이었기 때문. 

현대 엑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지금이야 해치백이란 개념이 크게 요상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에는 해치백을 타면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사고시에 바로 골로 간다거나 하는 인식이 많았고, 

'꽁지 빠진 차'라는 별명을 얻어 미운털 박히기 일쑤였다.

물론 2017년 현재까지도 몇몇 해치백 성애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노치백 차량들에 비해 해치백은 아직도 비주류이다.

아반떼와 I30만 봐도 차이가 극명 하다.

물론 I30가 비싸서 그렇지만....

현대 엑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88년 프라이드의 베이스인 포드 페스티바, 마쓰다 121에는 있지도 않은 

5도어 해치백 모델, 1990년에는 4도어 세단 모델(프라이드 베타), 

1996년에는 5도어 왜건 모델까지 생산하면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많이 팔긴 했지만 시장을 선도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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