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창업주인 윌리엄 라이온즈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XK120’을 새로이 출시하면서

재규어의 역사에 획을 그었다.

1955년에는 세단형인 Mk 시리즈의 차인 MkⅠ을 발표했는데,

2.4L 엔진을 얹은 차는 최고속도 193km/h 이르렀다.

이후 1959 발표된 MkⅡ는 4등식 전조등을 가진 재규어 디자인의 효시로

2.4L 3.4L 모델이 있었으며,

시속 201km/h까지 달릴 있었다.

게다가 Mk 3.8모델은, 1960년부터 3년간,

Tour de France Touring-car 부문을 싹쓸이 하여 다시금 성능을 입증해보였다.

여담이지만 1950 시즌 F1 그랑프리에서 페라리에게

자사의 XK 3.4L 직렬 6기통 엔진을 공급해준적도 있었다.

차명은 페라리 166 스파이더 코르사.

그리고 1960년에는 재규어에 온갖 경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Tour de France Touring-car 부문에 대한 승전보와 함께

재규어는 버밍행 스몰 암스라는 회사로부터 영국 최초의 자동차 메이커,

데임러를 인수하게 되는데,

이는 이후 재규어 고급 세단의 브랜드 명인 ‘데임러(소버린)’의 유래가 되었다.

재규어의 최고 걸작이자, 가장 아름다운 차로 손꼽히는 E-타입’은

바로 이때 탄생하게 되었다.

창업주인 라이온즈는 뒷부분을 마음에 들어했고,

팔리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르망 24 레이스를 호령하던 선대 경주차들로부터 물려받은

걸출한 성능과 안락한 승차감, 거기다 경쟁 모델이었던

페라리나 마세라티에 비교하면 반값도 안되는 합리적인 가격에

디자이너 말콤 세이어의 섹시한 스타일링까지 겸비한 E-타입은

1961 3월에 있었던 제네바 모터쇼에 출품되자마자

그야말로 너도나도 지르겠다고 달려들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그리고 E-타입은 1974 생산이 완전히 중단될때까지

72,500 대가 생산되어 현재까지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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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II는 Mk.I을 기반으로 차체 후방 에어인테이크를 증설하고 후미등 형상을 변경하고, 
포드 갤럭시에서 사용한 7L 포드 FE 엔진을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다. 
말 많은 변속기 역시 Kar-Kraft가 만든 4단 기어박스로 변경하여 신뢰성을 높였다.


이러한 변경은 차량의 성능과 신뢰성을 한층 높였고, 
그 결과 다음해인 1966년 르망 24시에서는 그 유명한 GT40의 1-2-3 피니시를 찍고 
포디움을 장식하는 쾌거를 올렸다. 
다만 이 때의 르망 24시는 결과에 말이 많았는데, 
브루스 맥라렌이 1등, 그 전까지 앞을 달리던 켄 마일스가 2등으로 들어왔다.


또한 이 차량은 굴욕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 다음해인 1967년에 일부 개량을 하였으나 신뢰성에 문제가 발생하여 
그 해 데이토나 24시경주에서 페라리에게 작년도 르망 24시 경주에서 포드가 페라리에게 시전했던 
1-2-3 피니시를 그대로 당해버리는 참극이 발생했기 때문.


Mk.III
레이싱 전용인 이전 모델들과 달리 공도 주행이 가능한 규격의 GT40. Mk. I을 기반으로 
엔진 출력을 조금 낮추고 승차감 향상 및 편의 장치 추가를 한 모델이다. 
생산 수량은 7대.


J-car
차세대 GT40 개발을 위한 프로토타입. 
J-Car라는 이름은 1966년 FIA에서 제정한 부록 J 규정을 준수하는 차량임을 의미한다. 
차량의 최초 완성은 1966년 3월에 이뤄졌으나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 잠시 개발을 접은 뒤 
그 해 르망에는 Mk.II가 참전했고 포드로서는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다시 J-Car의 연구 개발이 재개되었다.

GT40 Mk.II가 7L 엔진을 넣는 것을 목적으로 나머지 개량은 Mk.I에서 크게 이뤄지지 못한 데 비해 
J-Car는 아예 완전히 다른 GT40를 목표로 했고 
7L FE 엔진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 개발한 차량이다. 
차량의 중량을 감소시키면서 운전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재질의 허니컴 구조를 사용하여 차체를 제작했다. 
디자인 역시 공기역학적으로 더욱 최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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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모터 스포츠를 하고자 하는 포드와 
모터 스포츠를 위해 차를 만들어 파는 페라리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다. 
페라리는 포드에 회사를 매각한 후에도 모터 스포츠 분야를 포드의 간섭 없이 운영하기를 원했으나 
포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페라리는 이번 기회에 인디 500까지 페라리가 제패하길 원했고 
이는 포드 입장에서는 혹을 떼려다 혹을 더 붙이는 꼴이 되기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서로 노림수가 달랐기에 인수 협상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고, 
엔초 페라리의 일방적인 통보로 협상은 물건너 가고 말았다. 


협상이 파토난 배경에는 엔초 페라리 이하 페라리측의 
'미국 놈들이 모터 스포츠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라는 부심도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다. 
대신 페라리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투자자를 찾았고, 
최종적으로 피아트의 산하로 인수된다. 
페라리에 대한 인수 협상 과정에서의 실사 등으로 시간과 돈을 적지 않게 낭비한 포드 입장에서 
일방적인 협상 결렬 선언은 페라리 놈들은 우리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 자체였고
그 때부터 포드의 목적은 타도 페라리로 바뀌게 된다.


마음은 독하게 먹었지만 기술이 없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포드는 또 다른 모터 스포츠의 선진국인 영국에 연구 조직인 
포드 어드밴스드 비클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영국의 모터 스포츠 기업들과 접촉했다. 
그 가운데 포드가 선택한 것은 롤라였다. 
롤라는 F1을 비롯한 모터 스포츠 차량을 만들던 신생 기업이었는데, 
이 회사에서 포드 엔진을 얹어 만든 Mk.6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고, 
롤라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최고경영자였던 에릭 브로들리를 비롯한 
일부 엔지니어가 개인적으로 포드와 계약하여 협력하기로 하여 
Mk.6를 기반으로 신차를 개발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64년 3월에 최초 모델인 포드 GT40 Mk. I이 일반 공개를 하였다. 
GT40라는 이름은 언론에서 붙인 별칭으로 
차고가 40인치 남짓이라 붙은 것. 
포드 내부의 명칭은 그냥 포드 GT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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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소개할 차는 포드의 GT40이다.

포드의 레이스카. 
르망 24시의 1966년 대회부터 1969년 대회까지 4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 레이스카로 유명하다. 
총 생산 수량은 105대. 
당시 유럽 각국 및 유럽계 자동차 기업들로부터 모터 스포츠의 변방 취급을 받던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차량이기도 하다.


포드를 비롯한 미국계 자동차 회사들은 1950년대에 매우 잘 나갔으나 
정작 모터 스포츠 분야에서는 그리 두각을 내지는 못했다. 
물론 인디 500이나 NASCAR같은 대회가 있었지만 
F1이나 르망에서는 그렇지 못했고, 
그래서 유럽 및 유럽계 자동차 기업/레이싱 팀에서는 유럽 부심을 부리곤 했다.


포드는 생산 효율성만을 중시한 경영의 후유증으로 
1950년대까지 제너럴 모터스에 압살 직전까지 몰렸으나,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의 등판으로 반등에 성공하여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르망을 비롯한 유럽의 모터 스포츠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레이싱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포드 입장에서는 차량 개발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로부터 없는 기술과 경험을 빠르게 얻는 방법은 
기술은 사오면 된다이기에 포드 역시 유럽의 자동차 회사 인수 또는 지분 참여를 검토했고, 
여기에 당시 경영난으로 지분 매각을 검토하던 페라리가 눈에 들어 왔다. 


페라리는 이미 르망 24시를 비롯하여 전 세계 모터 스포츠에서 이름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특히 르망에서는 당시 무적에 가까웠기에 
포드 입장에서는 최상의 매물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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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트랙터로 번 돈으로 고급차를 여러 대 구입해 몰고 다녔고, 
이 중 페라리의 250GT가 있었다. 
차 자체는 괜찮았으나 클러치가 계속 오작동을 하는 것을 발견한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차를 분해해보았고, 
그 결과 람보르기니에서 생산하던 한낱 트랙터와 
최고급 페라리에 사용한 클러치가 같은 제품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엔초 페라리를 직접 만나 
자신이 발견한 클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페라리 본사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엔초 페라리를 만난 페루초 람보르기니였지만, 
당시 모터스포츠에서 연승을 거두어 자만하던 엔초 페라리는 
그의 면전에 대고 "댁같은 사람은 트랙터 모는 법이나 알면 됐고, 
내 차는 당신 분수에 안 맞으니 나가라."는 투로 대꾸하고 그대로 내쫒았다고 한다. 


그의 말은 페루초 람보르기니의 불 같은 성격에 기름을 부었고 
그 말에 화가 난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제대로된 스포츠카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이후 1963년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스포츠카 공장을 신설하고 
첫 번째 차량 350GT를 생산했다. 
1966년 람보르기니는 세계 최초의 슈퍼카라 할수있는 미우라를 발표했다. 
이 차는 리어 미드십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자동차였다. 
본디 빠르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차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그였지만, 
미우라의 성공으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페루초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의 뒤를 이을 강력한 신차를 계획했다. 


하지만 신차의 탄생을 지켜보기 전 그는 트랙터 사업의 재정난과 
석유파동으로 1972년 회사를 매각해야했다.

2년 후인 1974년 페루초 람보르기니가 꿈꿨던 자동차인 쿤타치를 내놓았고 
유명한 시저 도어도 이때 첫선을 보였다. 
당시에는 이미 스포츠카 사업에서 손을 뗀 그였지만 
그래도 생전에 자신이 설립한 회사 제품이라고 쿤타치를 즐겨 타고 다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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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에 비해 판매 대수도 적고 역대 모델 수도 상당히 적은 편이다. 
현재에도 페라리의 생산 모델은 8기통 엔진을 탑재한 엔트리 모델 488 GTB와 
그 파생형 모델들인 488 스파이더, 
컨버터블 GT인 페라리 포르토피노, 
4인승 슈팅브레이크인 12기통 슈팅브레이크 GTC 4 Lusso와 그것의 파생형 모델인 
8기통 GTC Lusso T,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플래그쉽 GT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로 무려 7종류에 달하지만, 


람보르기니는 12기통 엔진을 탑재한 플래그쉽인 아벤타도르S와 
아벤타도르S 로드스터, 
10기통 엔진을 탑재한 엔트리 모델 우라칸과 우라칸 스파이더, 
우라칸 RWD, 우라칸 RWD 스파이더, 퍼포만테, 
그리고 우루스 즉 차량 세종의 사양변경 모델만 있다.


페라리보다 판매 모델 수가 적고 모델 풀체인지 주기가 긴 대신 
도중에 한 번씩 페라리는 거의 하지 않는 페이스리프트와 
성능 향상을 거치기 때문에 퍼포먼스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 편이다.

2015년에 측정된 직원수는 1175명이며 그 뒤로도 더 많은 직원들을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한해 판매량은 2014년 대비 28% 상승한 3245대를 판매하였다고 한다. 
이는 우라칸과 아벤타도르의 판매호조 덕분인데, 
우라칸은 2242대, 아벤타도르는 1003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매출은 전년대비 39%가 증가한 1조 1537억 원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1998년 폭스바겐 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창업주의 삶을 짧게 얘기해보자면 
1916년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에서 포도농부 부부들 사이에서 태어 났다. 
그리고 기술자들이 그랬듯이 어렸을때 부터 농업보다는 농기구와 기계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람보르기니의 부모들은 아들을 볼로냐의 기계학교로 보내 기계를 배우게 했고,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이탈리아 공군에 징집되어 
로도스 섬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차량정비병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영국군 포로로 1년간 억류뒤 1946년도에 귀국을 하면서 
자동차 정비소를 차렸고 
1947년도에 페루초 람보르기니에게 부를 안겨다 줬던 트랙터 사업을 시작 했는데, 
당시 마셜 플랜으로 인해 농업쪽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왔고 
2차 대전이후 농업의 자동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트랙터의 수요가 엄청났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까지 경작용 트랙터를 생산하는 일을 하며 산업왕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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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0년에 세르지오 마치오네 회장 자신이 직접 한국에 

알파로메오를 진출시킬 의사를 피아트 한국지사장인 안용석을 통해 전달했다. 

2011년 서울 오토쇼에 알파로메오를 출전시킬 예정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무산. 

2016년부터 대한민국 정식 수입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2017년에서 2018년경으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저거는 본사 직원이 FCA 소속 직원에게 교육 후 들려 준 이야기다. 

아마 새롭게 다시 시작한 알파로메오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한국 진출은 확실해 보인다.

세르지오 마치오네 회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리고 2017년 10월, 알파로메오의 한국 진출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FCA 그룹은 한국에서 부진한 피아트와 크라이슬러 브랜드를 철수하고 

지프에 집중하고, 2018년 하반기쯤 알파로메오가 한국 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세르지오 마치오네 회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담으로 한국인들한테는 은근 호불호가 갈리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아직 대한민국 땅을 제대로 밟아 보지 않은 브랜드에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성능이나 브랜드 가치를 떠나 앞의 삼각형 그릴이 

한국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게 주된 이유다. 

이쁘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쁘다 하지만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들은 ○▽○ 같이 보이는 

귀여운 디자인이 우스꽝스럽다고 많이 깐다. 

단지 디자인이라기 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세르지오 마치오네 회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지금은 참가중인 메이저급 모터스포츠가 없지만 

모터스포츠 태동기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성적을 냈었다. 

페라리 만큼이나 레이싱에 잔뼈가 굵은 브랜드이다. 

그 유명한 페라리가 사실상 알파로메오의 품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안 레이싱 DNA의 시초라 할 수 있다.


F1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그랑프리 레이싱 때부터 참가했던 F1의 큰형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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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레이싱에 출전하나 싶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 사건 때문에 1915년 니콜라 로메오가 A.L.F.A에 부임하면서 

군수 목적으로 사용될 자동차와 비행기의 엔진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메오는 A.L.F.A와 함께 로마 등의 지역 철도를 입수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알파로메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20년 A.L.F.A.는 지금의 Alfa Romeo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엔초 페라리를 영입하여 레이싱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29년 페라리는 자신만의 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만들고, 

1939년에 페라리와 결별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알파로메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33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이탈리아 산업 부흥 공사 (IRI) 산하로 들어가게 되면서 

국영화되었다. 

1930년부터는 트럭, 버스, 승합차 제조에도 참여했으며, 

그 후 스포츠카 메이커로써 명성을 이어 가나 부진하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마켓과 더불어 

독일차들의 강세, 브랜드 파워 약화, 알파수드의 품질 문제로 인하여 

1986년에 피아트로 매각되어 다시 민영화 되었고, 

알파 로메오는 오랫동안 피아트 그룹 산하에서 계속 고전하다가 

소형차나 파는 브랜드로 전락하고 만다.


1995년에는 판매부진으로 북미 시장에서 아예 철수해 버리고 

2010년까지 목표 판매량을 이루지 못하는 등 안습의 길을 걸었다.

알파로메오 8C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다가 2005년쯤에 북미 시장으로 컴백한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세라티의 V8 4.7리터 엔진을 장착한 한정 생산 쿠페 모델인 8C를 먼저 내놓았다. 

2013년에는 4C를 공개해 다시 북미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최근의 야심작 줄리아로 라인업을 더 확장시켜 나아가고 있다. 

2016년 11월에는 D 세그먼트 SUV 스텔비오를 공개함으로써 두개의 핵심 모델을 안착시켰다.

알파로메오 4C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대중적인 인지도에서는 아직 한참 밀리긴 하지만 

매니아 층의 지지는 여전히 강력하며, 

독일 브랜드 외의 다른 유럽 브랜드들도 북미에서 인지도를 슬금슬금 넓혀가고있는 추세와 

바뀐 시장 판도로 미루어 일단은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되고있다.

알파로메오 스텔비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018년까지 라인업을 8대로 늘려 30만대 판다는 원대한 허세계획을 펼쳤으나 

예상치 못한 중국 마켓의 부진, 

미국 진출의 여파 등으로 인해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다가 

결국 2018년 6월에 마르치오네 회장의 마지막 알파로메오 지도로써 

2022년까지의 로드맵을 주주들에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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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소개할 메이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알파로메오이다.


자동차계의 전설

페라리의 스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fa_Romeo_logo.png

피아트 계열의 자동차 제조 업체이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에 본사가 존재하며, 

1910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도 건재한 기업이다. 

현재는 피아트 그룹의 산하 기업으로 스포츠성을 내세운 차량들을 개발, 생산하고 있다. 

탑기어의 전 MC 3인방이 모두 좋아하는 브랜드다.

알파로메오 탑기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부가티처럼 특이한 모양새의 그릴이 특징이며, 

마치 웃는 듯한 역삼각형 방패 모양이다.(0▽0) 

기통수도 적고 배기량도 낮은 엔진이지만, 배기음이 걸작이다. 

그 배기음으로 유명한 마세라티와 맞먹을 정도.


고성능 모델이 콰드리폴리오 베르데(Quadrifoglio Verde. 영어로 클로버리프) 버전이며, 

앞 펜더에 네잎클로버 엠블럼을 박아넣는 전통이 있다.


엠블럼 속의 붉은 십자가는 밀라노의 상징이며, 

그 옆에 있는 것은 14세기 밀라노를 지배한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의 문장인 

"Biscione", 즉 왕관을 쓴 구렁이가 무어인을 삼키는 모습의 그림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이 로고는 2015년 줄리아(Giulia) 발표 때 새로 디자인해 발표된 것이며, 

이전 로고와 색 배치 차이가 있다.

알파로메오 엠블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910년 6월 24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알렉산더 다라크, 우고 스텔라에 의해 

알파 로메오가 설립되었다. 

다만 처음에는 Anonima Lombarda Fabbrica Automobili, 즉 A.L.F.A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는데, 

이 이름이 현재의 알파 로메오가 된 계기는 1915년 니콜라 로메오가 

회사를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1910년에 24 HP를 만들기를 시작으로, 

점점 엔진의 출력을 높여 가 40, 60 HP 모델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알파 로메오가 성공하는 계기가 된 모터레이싱에 진출한다. 

처음에는 24 HP 2대의 모델로 시작했고, 1914년에는 레이싱용 자동차를 만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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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치알레, 페라리 458 이탈리아 4 (Ferrari 458 MM Speciale)


전체적으로 카본파이버를 많이 사용하여 무게를 200파운드나 감량했다고 한다.
2013년 탑기어 메거진에서 올해의 자동차로 선정되었다.
국내에선 2014년 3월부터 정식 판매하였으며 가격은 4억 3200만원

 

2014년에는 458 스페치알레의 하드탑 컨버터블 버전인
458 Speciale A(A는 Aperta의 약자이다)가 등장했다.
499대 한정판으로 출시되었다.

458 스페치알레 A는 페라리의 역대 라인업 출시일정으로 보건대
458의 최종 모델이기 때문에 이 모델의 등장은 곧 모델 교체 주기가 임박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분노의 질주 6에 잠깐 모습을 비추며 분노의 질주 7에서는 사막을 달리는 장면으로 나온다.


 458 스페치알레 실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016년 488이 출시 된지도 꽤 지난 시점에서
뜬금없이 458 스페치알레를 베이스로 원오프 모델이 제작되었다.
이름하여 페라리 458MM 스페치알레.
익명의 영국인 주문자가 주문한 이 차는 역대 원오프 모델과는 사뭇 다르게
디자인이 큰 폭으로 변경되기 보다는 기존 458 스페치알레를
조금더 곡선을 가미하여 과격하게 다듬은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곳곳에 라페라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공개되기 전에 한 번 위장막도 씌우지 않은 스파이샷이 공개되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488의 하드코어 모델로 예상했었다.

 

역사상 최고의 페라리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페라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델이자 페라리의 최고 효자 모델 중 하나로 자리잡은
458 시리즈는 마지막 458 스페치알레를 끝으로 2015년 여름에 단종되었다. 


후속 모델은 488 GTB이다.

 

488 GTB가 트윈 터보 엔진을 사용하기 때문에,
458은 사실상 페라리의 자연흡기 8기통 엔진을 사용한 마지막 엔트리 페라리가 되었다.

458 이탈리아 손흥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차의 오너로는 대표적으로 손흥민, 호날두,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있다.

458 이탈리아 타는 스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osted by 그대옆에